새알 뉴스레터 #28 | 2025. 10. 31 (금)
|
|
|
여는 질문 💭
[오늘의 레터와 친해지기 위한 준비운동]
둥지님은 3년이 지난 10.29 참사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나요?
(🦦: 저는 지금껏 ‘별들의 집’에 방문하거나 기억팔찌를 끼는 등 사소한 연대를 하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
|
|
오늘의 알맹이 💥
[오늘의 레터 코너별 요약]
메인🪺 | 10.29 참사와 국가 권력에 관한 논문을 바탕으로, 본질을 통찰하는 새로운 애도에 대해 고민했어요.
새참🫦 | 각자가 할 수 있는 애도의 방식과 다짐을 이야기했어요.
|
|
|
해피 할로윈~🎃 안녕하세요 둥지님, 에디터 수달입니다. 발행일 기준으로 오늘(10.31)은 10월의 마지막 날 할로윈이네요! 비록 직접 분장을 하고 사탕을 주고받던 건 초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지만, 다양한 곳에서 즐거운 행사가 열리는 만큼 괜히 설레기도 한 것 같아요. 조용히 사탕 하나를 꺼내 먹어야겠습니다ㅎㅎ.
그러나 한편으로, 할로윈의 설렘 이전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10.29 참사입니다. 어느덧 2번의 가을을 거쳐 3주기가 된 이태원의 그날. 2022년 당시 집에서 긴급 속보를 보고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그때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여러 일을 거치며 또다른 상징으로서 다시금 우리 앞에 찾아왔습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작년에 이어 10.29 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떻게 애도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
|
|
참사 3주기 당일, 저희는 학교 내 ‘세월호 참사 추모 준비위원회’를 주축으로 전체 묵념을 진행했습니다. 희생자분들을 기리며 함께 애도하고 기억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나 동시에 여러 질문이 제 머릿속을 떠다녀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인을 목전에 둔 지금의 난 묵념을 넘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할 수 있는가]’,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애도해야 하는가’···.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선 지금, 난 어떤 태도로 ‘기억’해야 할지, 성인이 된다면 더더욱 어떻게 사회의 아픔들을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지요. 그렇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마침 흥미로운 논문을 발견했습니다.
『국가 권력과 애도의 구성: 이태원 참사(10.29)에 대하여』 라는 논문이었어요. 국가 권력이 어떻게 애도의 방식을 통제하고 또 구성하는지, 애도가 어떻게 정치적 장치로 이용되는지 분석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모든 내용을 체화했다고 하기에는 어렵지만(ㅎㅎ) 인상 깊었던 내용을 나눠보자면, |
|
|
당시 정부가 참사 이후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공식적인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던 것 기억하시려나요. 이 기간 동안은 여러 행사·방송들이 취소되었고, 전 개인적으로 당시 시청하던 야구 경기에서 앰프 사용과 응원을 하지 않았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이 기간 동안 정부는 이태원 참사는 ‘불의의 사고’이자 ‘불가피한 재난’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어요. 주최측이 없음에도(즉 정부의 책임이 아님에도) 참사에 관심을 가지고 기간을 선포할테니, 기간 내에 갑작스러운 슬픔과 상실을 ‘해소’하자는 말이었지요. 저자는 이러한 국가 애도 기간이 “슬픔과 연관한 사회적 고리를 끊으며 슬픔을 순전한 정서적 산물로 만들었다”고, “해소하는 일은 오로지 피해 당사자의 몫이 되었다”고 주장해요. 또한 7일 이후 애도기간의 종료를 선포함으로써 “과거의 슬픔과 이후의 슬픔을 구분”하며 이후에 존재하는 슬픔을 배제(혹은 그 슬픔에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다는 의심을 받게) 했다고 말해요. 기간 선포로써 이미 국가의 책임을 완수했다는 태도로 말이죠.
|
|
|
2. 애도할 만한 존재 vs 그렇지 않은 존재 |
|
|
위 악성 댓글들은 제가 최근 10.29 참사 관련 영상에서 직접 발견한 댓글들이에요. 4개월 전, 1개월 전, 4일 전. 참사 이후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와 토씨 하나 변하지 않고, ‘놀러가서 죽었다’는 혐오가 가득합니다. 이 논리는 결국 애도와 추모의 자격, 그러니까 애도할 만한 존재가 있고, 반면에 그렇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저자는 이런 혐오 정서를 심화시킨 게 앞서 언급했던 ‘국가애도기간’과 정부의 보상/지원금의 세부 기준이라고 주장합니다. 애도기간을 통해 슬픔을 ‘강요’받은 국민들은 “슬픔을 묻기보다 슬픔의 당위에 대해” 물어요. 이때 —책임이 없는, 행정적 절차를 수행하는— 정부가 피해자 지원의 범위를 세분화하고 또 구체적인 비용으로 환원함으로써 그 애도의 자격 기준을 구분하지요.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고통의 위계를 만들고, 경쟁적인 피해의식을 갖게 만들어요. 이때 발생한 비용과 감정노동의 책임은 결국 ‘죄 없는 정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유가족에게 돌아가고요.
즉, 저자는 정부가 참사의 애도 방식을 ‘정서적인 슬픔’으로 규정[회피]하면서부터 참사 혐오 정서가 심화되었고, 참사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사적 영역으로써 희생자·유가족·생존자들에게 돌아갔다고 주장해요. 이렇게 은폐되고 부정당한 슬픔의 가능성들과 목소리들이 존재하고, 요컨대 각자의 슬픔의 몫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로 글이 마무리됩니다. 사람들의 여론과 혐오에도 기저에 깔린 정치적인 원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조명하고, 그 원인을 하나하나 파헤치는 분석이 개인적으로 정말 흥미로웠어요.
|
|
|
돌이켜보면 저는 지금껏, 참사와 관련한 다양한 혐오 정서 앞에서 숨죽였던 적이 많은 것 같아요. 반박할 언어가 부족해서, 그저 감정적 호소처럼 들릴까봐, 나 또한 공격의 대상이 될까봐…와 같은 이유로 안전한 침묵을 택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국민의 안전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정도까지였거든요. 자연스레 저의 애도는 슬퍼하고 묵념하는 것에 그쳤지요. 그러나 이 논문을 읽고 또 그 외 기사들을 찾아보면서, 무엇이 구조 자체를 작동시키는지, 어떻게 사람들의 여론이 형성되는지 등의 ‘그 너머의 진실을 사유하는 것’이 또다른 중요한 애도 방식임을 느꼈어요. 은폐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말에 치열히 귀 기울여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다채로운 목소리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믿으니까요.
끝나지 않은, 끝나지 않을 보랏빛의 10월. 성인이 되어있을 저는 앞으로 이렇게 기억하고 싶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고, 숨겨져있는 본질과 이면을 사유하고 통찰하면서요. 어쩌면 이게 사회에 필요한 ‘좋은 어른’의 역할일지도 몰라요. 저,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열심히 깨질게요🐣. 00둥지님께도 오늘의 글이 조금이라도 새로운 자극이자 애도의 출발이었기를 바라며, 오늘의 레터 마무리하겠습니다.
☂️⭐ 국가가 없었던 그날, 떠나간 159명의 희생자분들을 기억합니다.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여전히 기나긴 길을 걷고 있는 유가족·생존자 분들과 끝까지 연대하겠습니다. |
|
|
🥪 새. 참.🫦
[새알의 참견]
에디터 키키🍥, 이슈💬 |
|
|
키키의 참!🫲견 | 저는 팔찌나 반지를 불편해해서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요, 그래도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10.29 참사가 일어났던 달에는 기억 팔찌를 꼭 착용해요. 제 나름의 일상 속에서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밖에서 리본을 달고 있거나 팔찌를 한 사람을 만나면 괜히 힘이 나기도 하거든요. 최근에 이재명 대통령이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며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말을 넘어 행동으로 실천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사과와 발전은 단순히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곳의 빈틈들을 채울 때 힘을 발휘하니까요. 다시는 부재나 불찰로 인한 피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연대하겠습니다. |
|
|
이슈의 참!🤚견 | 저는 참사에 대해 말할 때 망설임이 많았어요. 감정적으로 보일까, 혹은 논리가 부족하다고 보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래서 애도는 주로 조용히 마음속에서만 하는 일처럼 남아 있었어요. 아마 참사를 기억하는 일과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일이 별개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레터를 읽으며, 참사의 반복을 막기 위한 질문과 문제 제기가 애도 자체의 과정이라는 점이 다시 떠올랐어요.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때때로 애도를 충분히 할 수 없도록 만들어요. 10.29 이태원 참사의 애도 기간이 일주일로 정리되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을 “정해진 기간 안에서 해소해야 하는 감정”으로 묶어버리는 순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지,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묻는 시간이 함께 줄어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참사에 대한 애도는 단지 슬퍼하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묻고 바라보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
|
+) 최근 런던베이글뮤지엄에서 한 노동자가 과로사로 사망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바라며, 모든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새알도 연대하겠습니다. |
|
|
둥지님! 오늘의 새알, 어땠나요? 많관부 🪺
[많은 관점 부탁해!] |
|
|
여는 질문 💭
둥지님은 3년이 지난 10.29 참사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나요? |
|
|
여는 질문에 답변하고 싶거나, 오늘 레터와 관련하여 의견이 있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새알은 언제나 둥지님들과의 소통을 기다립니다~ 우리 같이 얘기해요😊 |
|
|
|